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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부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 ‘웃음’과 ‘울음’을 동반한다. 승리가 결정되는 현장을 함께 했던 선수와 팬, 그리고 그들이 연출한 벅찬 떨림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 그 어떤 것도 흉내낼 수 없는 스포츠만의 특권이며 무엇이 명승부인가를 논의할 때도 놓칠 수 없는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올해로 15회째를 맞는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의 명승부는 역사속에서 여전히 빛난다.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따낸 금메달은 총 483개. 은메달과 동메달을 포함,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메달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5대 명승부’는 유달리 국민들의 기억과 가슴안에 깊은 파장을 그리며 승부가 이루어진 배경과 과정, 파급력 등에서 많은 의미를 남겼다. 그때만 생각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승부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5개의 이름은 무엇인가.
1.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남자농구...누가 감히 드림팀을 먼저 말하는가
스포츠에 ‘드림팀’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은 NBA스타들이 주축이 된 미국남자농구팀 때부터(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지만 이미 10년전에 먼저 한국에 ‘드림팀’이 있었다. 중국(당시 중공)과의 결승전 스타팅 라인업이었던 이충희·박수교·신동찬·신선우·임정명을 비롯, 전체적인 선수 구성(박인규·안준호·박종천·이민현 등)은 이름만으로도 설레이게 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들. 방열, 이병국 코칭스태프가 이들을 지휘하는 남자농구팀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패배는 어울리지 않았다. 첫 경기였던 쿠웨이트를 103-76으로 일축하며 몸을 푼 드림팀은 북한전에서도 노련한 신선우가 골게터 안광균을 방어하고 이충희가 중거리슛을 퍼부어 승리. 일본전에선 오카야마(226cm), 키타하라(204cm)의 더블포스트에 고전했지만 종료 1분전 박수교의 슛으로 위기를 탈출하며 기대대로 결승전까지 6연승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다. 아시아 공포의 센터 무티에추(238cm)가 불참하긴 했지만 위력적인 빅맨들이 즐비, 평균 신장에서 7cm 이상 차이 나는 중국의 고공농구를 극복하기는 어려워보였다. 방열 감독의 승부수는 지공이었다. 철저하게 공격제한 시간 30초를 안배하며 완벽한 찬스가 날때까지 템포를 조절했다. 77년 종별대회에서 다친 오른쪽 무릎 부상을 딛고 재기한 신선우는 단신 센터임에도 볼 컨트롤과 한박자 빠른 감각으로, 투지가 돋보였던 임정명은 허슬플레이와 리바운드로 득점원 박수교-이충희에게 기회를 열어줬다.
결국 지역방어를 결합한 변칙수비가 먹혀들며 한국은 한때 10점차 까지 주도권을 잡는 등 중국을 시종 압박, 줄곧 앞서가다 83-82로 쫓기던 종료 55초전에는 이충희가 골밑으로 파고드는 지능적인 플레이로 자유투 2점을 추가해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 하이라이트는 85-84로 1점 앞선 채 맞은 한국의 마지막 30초였다. 시간을 소비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한국벤치는 목이 터져라 “돌려라!”를 외쳤고, 중국은 인터셉트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며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며 1초...1초 시간은 타들어갔고 부저가 울리며 승리를 거두는 순간 모두가 한데 엉켰다.
경기가 끝난후 방열 감독은 “이날 경기에 일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모든 영광을 선수들에게 돌린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장의 열세에도 당당히 상대와 맞서 싸우며 한번도 리드를 허용치 않은 한국농구의 완벽한 금메달.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24년전 뉴델리 코트 위에 흘렸던 땅방울의 자취는 이젠 중년이 된 그들의 얼굴에 여전히 자랑스럽게 맺혀있다.
2. 86년 서울아시안게임 남자탁구...스포츠역사에 빛나는 명승부

86년 9월 24일. 박대리는 빨리 퇴근해야했다. 자꾸 시계만 쳐다본다. 오후 6시부터 한국과 중국(중공)의 남자탁구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알고보니 다른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다. 모든 이목이 서울대체육관에 쏠렸다. 거리의 택시들은 영업을 중단했고, 상점들도 일찍 문을 닫고 모두가 TV앞에 몰렸다. 월드컵때 나타난 현상들이 아니었다. 축구에선 골이 터질때만 단지별로 한꺼번에 술렁이지만 당시 탁구는 21점이 한세트. 한국팀 포인트가 나올때마다 전국이 몇초 간격으로 들썩들썩, 그때가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실 남자탁구는 금메달을 기대한 종목은 아니었다. 김완-김기택 투톱 체제로 ‘한국형 속공탁구’가 싹을 틔우고는 있었지만 부상으로 김기택은 하차했고, 70년대부터 한국탁구는 중국의 스카이서브만 나와도 지레 겁을 먹었다. 반면 중국은 랭킹 1위 장지아량을 축으로 첸신화-후이준으로 이어지는 막강 라인이 그야말로 철옹성, 79년 이후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치 않았다. 하루 앞선 일본전에서 한국이 5-2로 승리하자 사상 첫 2위를 할 수 있는 성적이라며 만족하는 분위기가 형성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운명의 단체전. 한국은 빠른 포핸드 스매싱이 돋보였던 “아자! 아자!” 트레이드 마크의 주인공 김완을 중심으로 혜성처럼 떠오른 안재형과 막내 유남규가 단체전에 나섰다. 단체전은 한국시리즈 7전 4선승제 보다 더 긴 9단식 5선승제. 매경기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녹색테이블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2.5그램의 탁구공은 25톤의 심리적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선수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안재형이 4단식에서 장지아량을 2-0으로 격파하며 상승세를 탄 한국은 5단식까지 4-1로 리드, 파란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이었다. 꺼져갈 듯 하던 중국이 막판 3게임을 내리 잡으며 4-4 균형을 이룬 것. 역전패에 대한 불안감속에서 운명의 9단식에 안재형과 후이준이 맞섰다. 세트 스코어도 1-1. 최후의 3세트는 7번의 동점과 두차례 역전을 주고 받는 혈전, 네트를 오가는 공을 쳐다보지 못하고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나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겨야 한다는 안재형의 강인한 정신력과 공수를 겸비한 기량이 후이준보다 앞섰다. 안재형은 마지막 포인트를 잡고 21-16으로 승리하자 그대로 벌렁 눕더니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안재형 위로 모두가 뛰어나와 겹치듯 쓰러졌다. 9시 뉴스도 연기되고 경기가 끝난 시간은 밤 11시 20분. AP통신은 “어느 누가봐도 이경기는 스포츠사에 남겨질 명승부”라고 극찬했고 “만리장성이 무너졌다”를 유행시킨 임주완 아나운서는 이후 “86년 한·중 탁구결승전은 내 인생 최고의 승부전"이라 회고했다.
대회이후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학생들은 야구 방망이와 축구공을 내팽개치고 동네 탁구장으로 총출동했고, 직장인들도 점심시간때만 되면 내기 탁구를 쳤다. 탁구 치고간 사람보다 왔다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간 사람들이 많을 정도. 하지만 무작정 탁구가 좋았던 그 시절, ‘5시간 20분 드라마’는 스물한번째 포인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3.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임춘애...우유가 먹고 싶었던 어느 소녀 이야기

최고의 동화작가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만들 수 없는 애절한 소녀의 이야기였다. 초교3학년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식당에서 밤새 일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무허가 움막에 여섯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 당시 17세였던 임춘애는 연탄가스 중독과 영양실조에 위장병까지 달고 다녔다. 여기에 그녀를 지도하고 있는 김번일 코치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육상계의 무명.
그렇지만 임춘애는 악조건 속에서도 더욱 이를 악물고 오직 달리는 것에만 전념했다. 하늘도 이에 응답했다. 86년 6월 전국체전에서 3000미터, 1600계주, 10km마라톤을 휩쓸며 서광이 비쳤다. 아시안게임까지 오름세는 이어졌다. 여자800미터에선 2위로 통과했으나 인도의 쿠리신칼이 120미터 체크 포인트를 지키지 않고 코스를 먼저 이탈해 1위를 하고도 실격, 첫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결승선을 앞에 두고 언제나 세상을 뜬 아버지와 고생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결국 그녀는 10월 3일 벌어진 1500미터 결승에서 초반 2-3위로 전개하다 100미터를 남기고 극적인 추월과 함께 4분21초38의 기록으로 우승, 행운이 따랐다는 800미터 금메달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외침으로 남은 그녀의 한마디 “우유를 마시고 뛰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어요...”
금메달의 영광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순간 임춘애의 울림은 모든이들의 가슴을 울컥 적셨고, 다음날 그녀가 3000미터에서도 가냘픈 몸으로 풀 스퍼트, 영화같은 질주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자 또 한번 온나라는 눈물 바다가 됐다. 울먹이던 임춘애가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트랙을 돌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자 스탠드는 20분간 하나가 됐다.
대회 이후 우유와 라면 신드롬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80년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며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유치해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의 고도 성장 이면에 자리한 가난과 실의를 이겨낸 육상 소녀의 승리,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나’라를 묻는 사회에 묘한 감정을 교차시켰다.
4.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축구 8강전...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남자

축구가 마지막날이었다. 아무리 개최국이지만 이는 눈에 보이는 일본의 2대 책략이었다. ▲대회 중반부인 10월 9일에 마라톤을 배정, 일본 마라톤의 희망 하야타를 내세워 황영조를 꺾고 분위기를 띄운다. 실력으로 황영조가 앞서있어 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중반 일정인 만큼 큰 타격은 아니다. ▲한국과는 2002월드컵 유치가 첨예하게 대립해 있다. 따라서 한국을 결승전 상대로 끌어올려 폐막일인 16일 30억 아시아인들의 눈앞에서 보란듯이 꺾음으로서 아시아 축구의 맹주 자리를 과시, 월드컵 일본개최를 기정사실화 한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편성했지만 이 계략은 시작부터 일그러졌다. 황영조가 남자마라톤에서 하야타를 따돌려 원폭에 희생당한 징용 한국인들의 한이 서린 히로시마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렸기 때문. 거기에 공교롭게도 예선 2승을 거둔 한국축구가 3번째 경기에서 느슨한 경기 운영을 하다 쿠웨이트에 패함으로써 조2위가 확정, D조 1위 일본과 8강에서 만나는 낭떠러지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94년 10월 11일. 그날의 축구는 이미 전쟁의 성격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다카기의 뛰어난 헤딩력을 빗댄 ‘BOMBA HEAD’를 비롯, ‘춤춰라 가즈’ ‘싸워라 하시라타니’... 일본 관중들은 여러가지 격문으로 관중석을 도배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한국은 위축됐다. 현장의 공기도 그랬지만 93년 10월 월드컵 최종예선 0-1패배 등 한국축구는 미우라를 앞세운 일본에 2연패를 당하며 밀리고 있었다. 그 미우라에 결국 전반 20분 선제골을 내주며 0-1. 일본 열도는 미친 듯이 들끓었다.
그러나 한국엔 ‘일본 잡는 사나이’ 황선홍이 있었다. 예선 네팔전에서 혼자서 8골을 몰아넣은 그의 그라운드 감각은 당시 최절정의 상태. 시간이 갈수록 점차 폭넓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교란하다 후반 9분 수비를 등지고 감각적인 힐패스를 유상철의 동점골로 연결하더니 20여분 뒤에는 역전 헤딩골까지 작렬, 어퍼컷을 속사포로 터뜨리며 통쾌하게 포효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종료 4분 전 한국은 일본의 수비수 이하라에게 기습적인 35미터 중거리슛을 얻어맞아 두 번째 동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한국은 후반 종료 직전 또다시 황선홍이 손을 잡아 끄는 이하라로부터 영리하게 패널티킥을 유도, 결국 3-2로 짜릿한 재역전승을 일궈내며 고국팬들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경기 휘슬이 울리자 땀과 흙으로 뒤범벅된 황선홍은 일본 관중들이 침통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화끈한 승리 세리모니로 환하게 웃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원하는 것을 들어줘서’ 이 보다 더 기쁠 수 없는 20대의 푸른 황선홍. 97년 도쿄대첩과 더불어 한일 축구사에 빛나는 명승부로 기록될 그날의 재역전극으로 인해 일본의 모든 ‘히로시마 프로젝트’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5.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농구...포기를 모르면 불가능도 없다

열심히 푸는데 답이 없는 수학 문제였다. 분명히 인쇄에 오타가 있거나 아니면 공식 자체가 잘못됐다. 일반적으로 농구에선 3분에 10점차가 역전의 마지노선. 그런데 종료 1분 12초전 9점, 25.5초 밖에 없는데 7점차(83-90)로 뒤져 있다면 이건 상식적인 비례식이 통하지 않는 난제, 도저히 이길 경기가 아니었다.
경기 초반 중국농구는 그들 표현처럼 탈아시아를 선언할 만 했다. 2미터를 상회하는 장신들이 스피드와 슛능력까지 갖춰 매치업에 우위를 뽐냈고, NBA 드래프트 1순위 야오밍은 잇따라 덩크슛을 꽂으며 한국 인사이드를 유린했다. 전반전 스코어는 36-49의 열세. 준결승전 이상민의 극적인 역전 3점포로 필리핀을 힘겹게 꺾고 올라온 한국에게 중국은 너무 벅찼다. 20년전 선배들은 리드를 내주지 않고 앞서가며 승리했지만 후배들은 경기내내 끌려가며 마지막까지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질 듯 했던 한국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버티던 경기종료 6분전 김진 감독이 꺼내들은 전면 강압수비가 통하며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서서히 체력에 문제를 보이던 중국은 발놀림이 현저하게 둔화됐고 3분전 김승현이 투입되자 추격 불길에 기름이 끼얹어졌다. 김승현은 특유의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중국이 자랑하는 포인트가드 류웨이의 패스 길목을 차단, 기민한 스틸과 어시스트로 중국을 당황케 했다. 승부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한국은 이후 연이은 파상공세로 거짓말처럼 점수차를 좁혔고 종료 17.7초전엔 88-90으로 따라붙은 문경은의 중앙3점포로 사직 체육관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관중들의 떠나갈 듯한 응원은 정확한 외곽슛으로 수년간 대표팀에서 한국을 괴롭혔던 ‘중국의 조던’ 후웨이동마저 패닉 상태로 빠뜨리며 결정적인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일으켰다. 결국 승부사 현주엽이 4.7초를 남기고 클러치 플레이의 진수를 선보이며 그림같은 골밑슛을 성공해 점수는 마침내 90-90 동점. 중국은 이후 종료 2.5초전 골밑의 야오밍이 노마크로 버티고 있었음에도 실수를 만회하려다 이성을 잃은 후웨이동이 무리한 3점슛을 쏘는 수훈(?)을 발휘, 연장까지 끌고간 승부에서 한국은 허탈감에 빠진 중국을 거세게 몰아붙여 마침내 20년만에 감격적으로 남자농구 금메달을 오버랩시켰다.
이런 멋진 경기를 동시대에 같이 호흡했다는 사실이 기분좋은 사람들, 전반까지 경기를 보다 “에이 다 졌네”라며 TV를 껐다가 크나큰 후회를 안은 사람들 모두에게 그날이 준 공통적인 교훈은 ‘포기를 모르면 불가능도 없다’... 한국남자농구가 연출한 명승부는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스포츠월드닷컴 심현석 기자 (hssim@segye.com)
사진자료 제공 세계닷컴 정보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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