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사회 경제

[스크랩] 자신들이 조상이라 말하는 아이누족을 말살하는 일본

♥1004 2006. 8. 21. 19:07

조상을 말살한 왜노민족

 

日本人들은 자신들과 닮지도 않은 아이누(Ainu)族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우긴다. 그러면서도 메이지(明治) 때 本土만이 日本이라 하며 아이누族 말살정책을 펴서 무수히 죽였다. 아이누族은 요즘 얼마 남아 있지도 않고, 최근 들어 일본인과의 혼혈로 순수혈통은 몇 명 안 된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라 부르는, 얼마 남지 않은 아이누族을 관광상품화하고 있다.

아이누족이 日本에 이주한 시기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5000년으로 추정한다. 더러는 기원전 7000년일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무려 10만 년, 20만 년 전까지 늘여잡고 있다.

아이누族과 죠몬인(繩文人)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마치 양자가 별개의 종족인 것처럼 구별하지만, 홋가이도(北海道)로 쫓겨난 先住民은 아이누족, 본토에 살던 선주민은 죠몬인(繩文人)이라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고대 韓半島人이 이주했을 당시, 이들은 新石器 文明을 영위하고 있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정복한 것은 明治가 사무라이들을 억지로 떠밀어 보낸 1869년 이후다. 列島에 정복왕조로서 정착한 시기가 3세기(伽倻), 4세기(百濟)(실제로 伽倻는 열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고, 百濟가 395년에 군사 식민지를 건설한 게 시초다)라 하면서 1869년 이후에야 겨우 北海道를 정복한 것이다.

 

 환무(桓武 : 칸무)가 783년부터 벌였다는 에미시(蝦夷) 정벌전쟁은 큐슈(九州)에 이주한 中國倭 정벌전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中國倭와 타협한 결과, 韓문화가 밀려나고, 倭문화로 도배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기모노섹스, 혼욕(混浴), 요바이(夜這い : よばい) 및 셋푸쿠(切腹)다. 그리고 기모노(きもの : 着物)와 일본어가 만들어졌다.


繩文人 즉 아이누族에 대한 설명은 일본민족 사이에서도 가지각색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오키나와(沖繩)에 국가를 건설한 사람들이 바로 류큐인(琉球人)이고, 北海道까지 간 사람들이 아이누족이다.”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10만 년 전, 아이누族의 조상인 원시인류가 동부 시베리아부터 지금의 사할린 섬과 일본 북부지방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주장도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아이누族이 열도에 언제 이주했나를 두고 온갖 숫자가 난무한다. 1만 년, 2만 년, 4만 년, 10만 년. 심지어 20만 년이라고 우기는 자도 있다.

이쯤이면 新石器人이 아니라 舊石器人인 것이다. 완전 숫자 붙이기 경쟁이다. 18세기 이래로 일본에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왜곡과 미화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노예민족(일본 스스로 倭奴國임을 인정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노예국임을 인정하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나라다) 주제에 “일본이 4대 문명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은 7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繩文人 즉 아이누族은 일본이 역사를 높일 필요성이 인정될 때만 끌어들이는 존재지, 그 외에는 역사책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다. 이들 아이누族은 日本史를 끌어올리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에 의해 明治 이후로 神으로까지 격상됐었다. 물론 日本史冊 속에서만 그렇다.

1869년부터 明治는 본토에서 北海道로 적지 않은 인간들을 내몰았다. 이들은 주로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무라이(侍)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은 北海道에 살고 있던 선주민 아이누족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이 둘의 싸움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데, 박물관까지 꾸민 걸로 봐서 일본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오도리 공원(大通公園) 옆에 시계대가 있다고 하는데, 시계대 안은 역사 자료관이다.
그 안에는 바로 그 옛날, 이곳 北海道를 개척할 당시 둔전병들이 입었던 군복, 그들이 사용했던 장총, 수통, 각반 그리고 각종 식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놀랍게도 당시 米 陸軍이 쓰던 것과 100 퍼센트 동일한 것이다. 즉, 그들은 米國의 南北戰爭 당시 입었던 그 복장과 총, 그 장비로 北海道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죽이면서 北海道를 개척한 것이다.
오늘날 아이누族은 北海道 땅에서도 산간 오지에 들어가 마치 화전민처럼 살거나, 관광자원으로 전락되어 관광객들 앞에서 춤을 추고, 기념품을 팔면서 먹고 산다. 그것은 현재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세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明治 때에 이르러서도 일본은 군복, 장총, 수통, 각반, 식기류조차 만들 능력이 안돼 米國이 남북전쟁 당시 쓰던 골동품을 구입해 北海道를 정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누族 말살정책을 펼친 일본인들에게 이런 가당찮은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세계의 6528개의 언어 중 절반이 타민족에 대한 억압적인 언어정책과 유력언어의 문화적 경제적 흡인력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21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언어 보존의 모범사례로 일본의 아이누族에 대한 정책을 제시했다. 北海道에 사는 아이누族은 80년대 말 母語를 쓰는 사람이 8명밖에 안됐으나 아이누族 박물관을 개설하고 母語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독려한 결과 지금은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 http://ikc.korea.ac.kr/%7Ebmkang/d_dona_worldLang1.htm, 세계 3000개 언어 사멸 위기, 동아일보, 2002/02/21)


개설했다는 아이누族 박물관은 아이누族 말살정책을 펼 당시에 사무라이들이 입었다는 米 군복을 전시해둔 박물관으로 여겨진다. 유네스코한테는 박물관에 전시된 총과 군복이 추수라도 도와주는 걸로 보였단 말인가. 아이누族의 언어를 부활시킨 것도 관광상품 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모범사례라 부른다 말인가.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아이누族은 머나 먼 중국도, 인도도 아니고 시베리아도 아닌 바로 지척지간의 동북아에서 건너간 종족이다.

신석기인 아이누族에게는 항해술이나 조선술이 없었다. 日本은 中國倭가 이주한 9세기 이전까지는 東中國海도 건너지 못했으며, 그나마 난파 당하고 침몰하기 일쑤라 9세기 말, 겁에 질린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 845~903)가 중국 대륙으로 가길 거부했다.

이후 14세기 말까지 동중국해를 건널 능력이 없었다. 아이누族은 시호테알린(Sikhote-Alin) 산맥 이북의 흑룡강 유역에서 협소한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 섬으로 이주했다가 열도 전체로 남하했다. 한민족이 시베리아에서 남하하자, 열도로 이주한 종족이다.

◀ 푸른색은 한민족 확산경로. 주황색은 한민족 확산 세부경로. 보라색은 아이누族 이동경로

요컨대 아이누族은 동북아에서 열도로 이주해서 繩文人으로 살다가 百濟人과 新羅人이 상륙하면서 北海道로 쫓겨난 종족인 것이다. 오키나와인(沖繩人)들은 아이누族이 항해술을 획득했을 때, 가고시마(鹿兒島)에서 사쓰난제도(薩南諸島), 오오시마(大島)섬을 건너 징검다리식으로 이주한 땅이다.

그렇다면 유전학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진짜 일본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자신들과 닮지도 않은 아이누族을 조상이라 부르며, 말살정책까지 편 일본의 억지 주장은 도대체 무엇인가?

繩文時代는 新石器 시대였고, 야요이(彌生) 시대는 철기 시대였다. 繩文 시대는 기원전 3세기까지 계속 됐다. 다른 나라에 비해 문명의 정도가 엄청 낮은 거다.

열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바로 넘어 갔다. 다시 말해 열도의 철기 문화는 절대 자생적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어떤 우월한 민족이 신석기 시대의 열도에 철기 문명을 전해줬던 것이다. 그 민족이 열도 바로 옆의 한반도 거주인 말고 또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역사왜곡학(歷史歪曲學) 발흥 이후 노예사를 던져버리고 싶어 했던 倭奴들은 백 년 전에 `변형 이론(變形理論)''이란 걸 만들어 냈다. 현대 일본인이 3만년에서 1만 2천년 전에 중국 남부지방에서 이주해 온 단일조상으로부터 점차 진화해 왔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일본국립유전자협회에서는 호라이(蓬萊)의 단독연구를 공식 인정하고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deoxyribo nucleic acid) 다형(polymorphism)을 분석한 결과, 日本 本土에는 순수 본토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4.8%에 불과하고, 中國人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25.8%, 韓國人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24.2%라고 한다. 25.8%는 3만년에서 1만 2천년 전에 이주한 中國人이 아니라, 8세기에 이주한 中國倭의 유전자다.

호라이의 단독 연구는 한국인, 중국인, 선주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을 다 합쳐도 54.8%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45.2%는 누군가. 바로 메국인(米國人), 유럽인, 아프리카인들이 아니겠는가. 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의 나라 일본의 여자가 선호하는 섹스대상은 5백 년 전부터 일본남자가 아니라, 서양남자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9세기 말 여러 번 일본에 다녀갔었다는데, 그는 두 권의 ''일본일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은 거의 일본 여자들과의 성행위의 기록이라고 한다. 대낮에 떼거지로 배로 찾아온 일본 처녀들과 프랑스 선원들의 선상 난교, 저녁이면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도 반겨주는 마을 처녀들의 ......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인들도 이해 못하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그 동안 얼마나 문란한 성문화를 영위해왔는지 알려주는 결과라 하겠다. 바로 일본민족 개량사업의 결실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있는 花郞世紀의 기록은 저 미개민족 華夏와 中國倭의 난잡한 성풍속이 新羅로 날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夫餘와 高句麗에 兄死取嫂制(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마디로 웃기는 말이다. 朝鮮은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笞刑으로 다스릴 정도로 엄격한 나라였다. 婦女子들은 정숙하여 淫亂하지 않았다고 했다(番韓世家). 桓國 시대부터 5訓의 하나로 淫亂치 말라고 가르친 우리민족이다(桓國本紀). 과연 그런 나라의 계승국들이 兄死取嫂제를 풍속으로 삼을 수 있는가. 

高麗時代조차 정숙함이 미풍양속이었다. 太祖 王建은 訓要十條를 남기면서 단정한 몸가짐을 당부했을 정도다. 4조, 거란(원래는 華夏族이었다. 李氏朝鮮 왕이 濊貊族이다 보니까, 靺鞨도 빠지고 거란으로 낙착됐다)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 

桓國시대부터 高麗시대까지 정숙하라고 가르침을 받은 우리민족은 문란했고, 미개 濊貊族은 지극히 아름다운 성풍속을 가졌단 말인가. 우리나라가 濊貊族에 의해 교화되어 문명인이 되었단 말인가. 성이 문란하고 개방적인 것은 濊貊族이다. 우리민족인 척하고 살자니, 어쩔 수 없이 절제해야 했던 것이다.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온갖 날조를 다한 나라다. 禹氏皇后가 시동생과 혼인했다고 날조하고 우씨황후를 매도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은 나라다. 형사취수제가 고구려의 풍속이었다면, 고구려 전체를 비난해야지, 우씨황후만을 비난할 수가 없다.

 

兄死取嫂제는 대대로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유목민의 풍속이었다. 다시 말해 華夏族 이하 中土의 풍속이었다. 당연히 濊貊族의 풍속이기도 했다. 皇后가 시동생과 혼인했다면, 高句麗人이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다. 

 

兄死取嫂制가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유목민의 풍속이라서 李世民은 제 형제를 죽이고 그 妻를 취했다. 唐 高王 李治도 아비의 後妃인 武則天을 왕후로 삼고, 이융기(李隆基 玄王) 역시 며느리였던 楊貴妃를 후궁으로 삼았다.

 

遊牧民 鮮卑族 唐에서는 兄死取嫂, 父死取母 등이 미풍양속 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부끄러운 풍속을 희석하고자 우리나라까지 물귀신처럼 끌어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後代의 난잡한 성풍속에 이르면, 전부 우리나라 풍속으로 둔갑시켰다.

 

濊貊族은 티벳고원 북부를 휘저은 紅巾賊이 종이 위에서 開京(장안성)을 유린하자, 恭愍帝가 몽진까지 떠나고 피난지에서 신년하례 잔치까지 열었다고 날조했다. 그 뿐인가. 恭愍帝가 신돈(辛旽)에게 정치를 맡기고,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해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洪倫·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살해되었다고 온갖 추잡한 날조는 다했다. 원래 濊貊族이 추잡해서 그렇다.

 

정작 문란한 나라는 濊貊族이 왕 행세하던 李氏朝鮮이었다. 李氏朝鮮이 蓄妾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濊貊族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蒙汗조차 一夫多妻가 전통이었다. 그 풍속을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만든 것이 바로 蓄妾이다. 李氏朝鮮에 離婚이 없었던 게 濊貊族의 풍습이었을 것 같은가. 中奴조차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졌다.”    

지난 5백 년(倭奴 땅에 서양인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해는 1543년이다)간 세계 다른 지역의 유전자와 뒤섞으려 고군분투한 일본민족의 공로를 치하하자.

사실 민족이란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 우리는 기원 후 800년을 전후해서 각기 다른 민족으로 갈라졌다. 더 이상 유전학적으로도 한민족과 동일하다는 소리는 할 수 없다.

일본인은 한국인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日本 列島에 남아 있는 문화재, 유적, 유물에 이르면 특히 더하다. 꼭 말할 수밖에 없을 때는 야요이(彌生)人이라든지 渡來人이라든지 하는 애매한 말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桓武(칸무) 天皇...... 의 지배 하에서 渡來系 氏族이 중시된 것은 어머니의 출신이 朝鮮 渡來系 氏族이며” 이런 식이다. 하긴 桓武 이후로 日本王은 中國倭 혈통이다. “일본의 문명을 만든 야요이(彌生)人은 큐슈(九州)나 간사이(關西)에서 왔다.” 우리나라에서 규슈(九州)나 간사이(關西)로 갔다는 것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日本人의 조상이 누군가에 대한 설명을 끝내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겠다. 뉴턴(한국판) 2003년 9월호 8페이지를 보면, ‘아프리카 단일 기원설에 입각한 현대형 호모 사피엔스의 확산 경로’가 그림으로 나와 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그린란드에 붉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韓半島에는 화살표가 수직으로 그어져 있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는 어떠한 표시도 없다.

日本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에서 바다를 지나 열도로 화살표가 그어져 있어야 한다. 실제로 태평양상의 눈에 띄지 않는 섬들에도 이리저리 다 화살표가 그어져 있다. 아이누族을 사할린의 선주민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캄차카 반도에서 큐릴 열도로 화살표가 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조차 없는 것이다. 이번만이 아니다. 전에도 인류의 확산경로 기사에서 열도만 쏙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현재 1억 3천 명이 살고 있다. 그럼 일본인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이것은 일본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게다가 기사 내용은 일본인 연구자가 인류 진화과정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냈다는 내용이다. 더구나 뉴턴은 일본에서 만드는 책이다. 자신들의 조상은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있을 게 틀림없다.

일본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얘기는, “일본인은 이 세상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없는 고유 민족(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지구 서쪽의 인종과 유전자를 섞고 싶어 혈안 이었음은 최근 5백 년간의 일본사가 보여준다)이고, 야마토(大和) 왕국은 수천 년에 걸친 정치, 사회적 발전단계[일본인의 유전자를 연구한 과학자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허구다. 열도에 국가가 성립한 것은 百濟 17대 皇帝 아신제(阿莘帝 ?~405) 4년인 395년이다. 그것도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했다. 이것까지 포함시킨다 해도 1600년사에 지나지 않는다]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 토착 지배세력인 天皇家[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王이 天皇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긴 金印은 일본이 애지중지하는 國寶다] 선조들의 노력으로 수립된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한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 내지 공감대가 있기에 일본에서 역사왜곡이 기꺼이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日本史는 그런 일본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일본민족은 겨우 2200년 전부터 韓大陸에서 건너간 古代 韓國人과 8세기에 건너간 華夏族 출신의 中國倭다. 아이누族 마저 동북아에서 건너갔다. ‘수천 년에 걸친 정치,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 토착 지배세력’은 “한여름 밤의 꿈”같은 소리고, 그나마 先住民인 아이누族 이라도 보존해야 列島에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존재해왔다는 긍지(倭奴民族은 자신의 조상도 아닌, 舊石人 에게서도 긍지를 찾는 민족이다)라도 가질 수 있는데, 오히려 말살정책을 취해 지금은 아이누族을 전세계 멸종위기 희귀동식물 목록에라도 등록해야 할 형편이다. 실낱같은 긍지라도 잃지 않으려면 관광상품화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금부터라도 아이누族 봉양에 전력해야 하지 않을까. 

 

묘하게도 일본인의 머리 속에는 美國에 대해서 표현은 米國으로 쓰면서도 그 속내 사정은 親美에 다름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문화민족들에 대한 하등민족의 침략이 성공하는 상황에서 강포한 도둑같은 미국의 현재가 결국은 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들의 터전 위에서 쌓아올린 것이라는 下等民族 共有의 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쯔라(桂太郞) 태프트 조약으로 李氏朝鮮을 집어 삼켰던 대한제국말기의 현상은 오늘도 역사의 되물림으로 이어져 새로운 美日同盟을 이끌어 내었다. 

 

동양삼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한다. 미개했던 서양 오랑캐들도 주변국과 서로간의 역사책을 머리를 맛대며 다시 쓰고 있다. 동양사가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는 이웃한 국가간에 공동의 이해와 선린을 다짐하는 길이며, 광활한 동아시아 대륙을 주름 잡았던 고려의 멸망으로 서양이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판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상선약수 지음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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